설교 본문: 마가복음 10장 46~52절
설교자: 금곡동산교회 이충만 목사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 10:4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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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
47 |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48 |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
49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
50 |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
51 |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
52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3번째 왕. 지혜의 왕. 솔로몬 대왕님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 대왕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1천 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은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물어보셨죠.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내 꿈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물어보신다면 나는 무엇이라 대답할까? 생각만 해도 매우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로몬 대왕님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듣는 마음.. 선 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첫 번째 소원으로 소원을 10가지로 늘려달라는 그런 소원을 빌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두고두고 우려먹겠다는 거죠.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신 김구 선생님은 하나님이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물어보신다면 첫 번째는 대한 독립이고, 두 번째는 우리나라의 독립이고, 세 번째는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바라는 소원. 여러분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무엇을 주기를 원하냐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아마 제가 생각할 때 솔로몬과 같이 지혜를 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를 알고 있거든요. 지혜를 구했더니 물질도 주셨고, 명예도 주시고... 부귀 영광을 다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귀와 영광을 주실 것 까지 생각하고 아마 지혜를 구하지 않을까 생각 해 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혼자 피식 웃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러실 리가 없잖아? 라는 생각으로.. 허황된 꿈은 접자... 이런 생각 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솔로몬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일천 번제도 드리지 않은... 우리보다도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오늘의 말씀을 읽으며 허황되다 생각한 그 꿈을 다시 꿔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음 말씀은 예수님이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기적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치 앞조차 볼 수 없기에 어디가 길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한 다는 것은 일상생활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 듭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빠르게 달리기도 어렵고, 발밑에 있는 돌부리를 보지 못해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자동차가 오는 것도 보지 못하겠죠. 이렇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불편하다는 것을 넘어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나온 바디매오도 그랬습니다. 이 때 당시에 그가 할 수 있는 있었던 일이라고는 다른 사람들의 동정을 바라며 동냥을 하여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에서 이름이나 몸의 특징을 설명할 때는 단순히 물리적인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에도 의미가 있고 그것을 통해 그 사람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이 어둡다는 것은 단순히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상황을 넘어 그의 마음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 그의 마음에 빛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절망에 물들어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디매오였을까요? 참 희한한 이름입니다. 디매오는 불결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결함의 아들. 더러움의 자식. 오늘 예수님을 소리 질러 불렀던 그는 정결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지냈으나 안타깝게도 눈이 먼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열심히 살았으나 안타깝게도 무언가 안 된 그런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죠.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대대로 불결한 사람입니다. 깨끗하지 못합니다. 죄 있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땅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그 잘못에 넘어진 사람. 힘들다고 하면 주변 모든 사람들이 생각할 때 ‘니가 잘못했잖아’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불렀을 때 주변 사람들이 꾸짖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르짖음에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의 걸음걸음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사건을 바로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그 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시고, 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마지막 여정. 그 위대한 걸음을 멈추게 만든... 한 불결한 자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능력도 좋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선하지도, 깨끗하지도 못한... 사회적으로 아무런 가치 없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의 유익이 될 만한.. 그런 한 사람의 외침에 주님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정결한 사람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고 주님께 가까이 가길 바라시지만, 우리가 정결하지 못하다고, 부정한 상황에 있다고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의 길을 가실 때... 그 길을 가지 못하고 쓰러지는 우리를 위해서 길을 멈추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그런 분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간절함에 발걸음을 멈추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 때로는 믿음이 약하여 넘어지고, 나의 실수로 넘어지고, 우리의 상태가 거룩하고 정결하지 못하여도, 주님을 구하는 우리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아름다운 찬양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쌈빡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비천한 자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절박한 외침이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한 더러운 거지의 외침이었습니다. 모두가 비난했던 그 외침에 주님은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바라는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의 외침에 주님은 멈추어 서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어보셨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러한 기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주를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참 신비롭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적어도 사람에 있어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든지...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다른 작은 일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 일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소를 위해서 대가 희생된 사건입니다. 고작 피조물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한 사람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99마리의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 마리의 양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99마리를 내버려두고 1마리의 양을 찾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또한 우리도 그 사랑을 닮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디매오가 한 번 부르짖었을 때 즉시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 소리 질렀을 때 주변의 반응을 보면 마치 주님이 거절한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꾸짖고 잠잠하라 했습니다. 주님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기도하고 부르짖고, 힘들어 기도할 때마다 응답이 팍팍 오면 누가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주님을 믿고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실 때가 많다는 것은 여기 있는 우리 모두다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응답보다는 거절이.. 아니 거절도 아니고 그냥 침묵하실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마치 안 계시는 듯 숨어 계신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경험하고 거기에 낙담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응답받고, 눈에 보이게 무언가 잘되고 한다면 하루에 한 시간 이상 다들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잘 안 그러시네요. 대체 왜 그러시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까지는 차라리 다행입니다. 응답해 주시고 분명이 주님이 콜! 하셨는데...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장하죠. 분명히 주님이 약속하셨는데... 약속만 하시고 묵묵부답. 희망고문. 차라리 약속 안하셨으면 포기하겠는데... 포기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 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 지고 싶어 물질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자체를 주셨다. 처음에 이 글을 읽고 든 생각은 “아니 결국 하나도 안 들어주셨잖아!” 였습니다. 다 좋은데... 그래도 적당히 좀 들어 주시는 기도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원망하는 저에게 이 글의 마지막 부분은 또 다른 희망이 되었습니다. 내가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를 들어 주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한 기도는 모두 들어 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내가 기도로 말한 것은 들어주지 않았지만... 진짜 마음 속의 갈망... 내가 정말 원헀던 소원은 들어 주셨습니다. 행복해 지려고 물질을 구했는데... 행복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원해서 성공을 구했는데 주님이 칭찬하시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글도 인용했지만 전 여전히 주님이 왜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는지, 혹은 거절하시는지, 심지어 비전을 주시고 꿈을 주시고 약속을 주셔놓고 그 반대의 길로 데려가시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오늘 나온 바디매오처럼 계속해서 소리지르는 것입니다.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꿈을 보여주신 주님이 여전히 침묵하시지만 다시금 꿈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다 시험 들었는데 계속 기도합니다. 세상의 벽에 믿음이 무너져도 다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발걸음을 멈추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우리 삶이 주님의 뜻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에는 침묵하고, 응답 받았으나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까지 점차적으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반대 방향으로 우리의 길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일이 있을 때... 계속해서 기도하고 끝까지 주님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성경대로 우리에게 복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 하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님께서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십니까? 예전에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 힘든 일이 있거나.. 후회되는 부분이 있으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 한 번쯤 해 보죠? 그런데 과거로 돌아가면 하려고 하는 일이... 일단 로또 번호를 외울 거 같더라구요... 학생 때는 지혜를 달라고도 기도했습니다. 머리가 좋아져서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곳에 취업을 해서.. 풍족한 삶을 사는 것... 조금 더 생각해보니 지혜도 필요 없고, 과거로 돌아갈 필요도 없고 그냥 돈이 많아지면 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저처럼 그냥 돈이면 되는 그런 소원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너의 소원을 하나 이루어 주겠다고 하시면 무슨 소원을 빌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현실적이고 욕심이 가득한 그런 꿈을 제외하고 그래도 주님이 기뻐하시고 그럴듯한 혼자만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님 조금 더 있다 가세요. 주님과 조금 더 함께하고 싶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전 이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너무 흡족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이 질문을 받은 사람은 바디매오 뿐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오늘 말씀 바로 앞에도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물어보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은 말했습니다. 주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기 원합니다. 그 영광에 참여하기 원합니다. 주의 영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아마 제가 내린 결론에도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실까 생각 합니다. 너는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 주여... 바디매오는 말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소망합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이 맹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보기를 원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맹인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상태를 바로 알게 된다면 우리 또한 주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왜 눈을 뜨고 싶어 했을까요? 무엇이 보고 싶었을까요? 아니,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눈이 주를 보기 원합니다. 주님을 본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다가 예전에 봤던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아바타라는 영화인데 거기 나오는 나비족의 인사가 i see you. 당신을 봅니다. 입니다. 영화 아바타의 엔딩곡 I see you. 그 가사의 몇 부분만 조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영어는 잘 못하니 한글 번역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을 봅니다.
당신을 통해서 나를 봅니다.
당신의 삶이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비춥니다.
저의 삶을 드립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살아요.
당신을 봅니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앞길을 마주했을 때도 단 한 분.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인생 속에서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더라도 주님만은 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 있더라도... 주님을 볼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있음을 안다면, 우리의 마음이 그 분을 향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니 주님‘만’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이 우리의 기도에... 너무나 다급하고 간절한 기도에 침묵하실 때도.. 거절하실 때도... 심지어 말씀하셔놓고 안도와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믿음을 이야기하고 다시 꿈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단 한사람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신뢰함으로 구원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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