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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개와 같은 자(사무엘하 9장 5~8절)

설교 모음/이충만 목사 설교

by Hope103 2019. 11. 28.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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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죽은 개와 같은 자

설교 본문: 사무엘하 9장 5~8절

설교자: 금곡동산교회 이충만 목사
주일예배 설교문

 

죽은 개와 같은 자(사무엘하 9장 5~8절)

5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7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

8

그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 보시나이까

 

죽은 개와 같은 자

 

유대인의 스승인 '랍비'가 그의 제자에게 물었다.

 

"같이 굴뚝을 청소한 두 아이가 있다. 그런데 한 아이의 얼굴은 더럽고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했다. 누가 얼굴을 씻겠는가."

 

제자는 답했다.

 

"그야 당연히 얼굴이 더러운 사람이지요."

 

그러자 랍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 더러운 얼굴을 한 아이는 깨끗한 얼굴의 아이를 보고 자신의 얼굴도 깨끗할 것이라 생각하고 얼굴을 씻지 않았고, 얼굴이 깨끗한 아이는 더러운 얼굴의 아이를 보고 자신의 얼굴 또한 더러울 것이라 여기고 얼굴을 씻을 것이다."

 

아이는 큰 깨달음을 얻어 말했다.

 

"과연 그렇군요. 스승님, 제게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자 랍비는 이번에도 같은 질문을 했다. 제자가 당연히 깨끗한 얼굴의 아이가 씻을 것이라 하자, 랍비가 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어찌 똑같이 굴뚝 청소를 하였는데 한 아이의 얼굴은 더럽고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겠느냐."

 

자신이 깨끗하다 생각한다면 씻지 않을 것이고, 더러워졌다고 생각한다면 씻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당연히 둘 다 더러워져 있겠죠. 그러니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더러워졌을 것이라 생각해서 둘 다 씻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냥 거울을 보면 간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외면에 보이는 얼굴이나 몸은 거울로 보면 쉽게 알겠지만, 혹시 마음상태를 알려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의 인물들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성경에 나온 인물들은 마치 함께 굴뚝에 들어간 친구와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개 같은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때 많은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성군.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사람. 바로 다윗 대왕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국기가 무엇입니까? 가운데 별 하나 있죠? 그것을 다윗의 별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다윗에 대한 이스라엘의 존경심은 어마어마하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님과 광개토대왕님을 합쳐놓은 정도의 이미지와 그 정도의 존경을 받고 있으시다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 국가를 안정시킨 후, 이제 모든 걱정이 사라진 다음 했던 일은 사울의 집에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누구입니까? 다윗 이전에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될 것을 경계해서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니던 사람이이기도 합니다. 사울의 집안사람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에서 왕이 될 명분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반역을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의 통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모의해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사울의 족속 중에서 왕으로 세우겠다는 명분을 쓸 수 있는 사람. 그들이 바로 사울의 집안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극과 같은 곳을 통해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족을 멸하거나, 귀양살이를 보내서 다시는 왕궁 근처도 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앞으로 자신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 없애버려야 하는 사람. 므비보셋이 오늘 마지막에 직접 고백한 것처럼 다윗에게 므비보셋은 정말 죽은 개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옆에 보이면 빨리 치워버려야 하는... 없애 버려야 하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에게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넘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그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능한 모든 사람과 함께 화목하려고 하지만... 인생살이가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살다 보면 장애물 같은 사람들 한두 명씩은 만나지 않습니까? 한두 명 만나면 적게 만나는 것이죠. 특히 정직하게, 착하게 살려고 하면 그걸 넘어뜨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착하게 살아도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들 그냥 신경 안 쓰고 살면 편합니다. 저 사람은 원래 저래! 그러고 넘어가면 편합니다. 제가 사역을 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그럼에도 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생기면 그냥 신경 안 쓰고 별로 친하게 안 지내면 되니까 편했는데... 사역을 하면 이제 전도사고 목사니까 교회 성도들을 무시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참 어렵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적당한 친절을 베풀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화 내지 않기 위해 무시하며 사는 것은 어찌어찌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은 매우 적극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나 먼저 용서 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멀리서 사람들을 시켜서 돌보는 것이 아니라 왕의 식사자리에 초대하고 모든 재산을 돌려준 다윗의 행동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그런 사랑입니다. 그런 부분에서 다윗은 우리 신앙생활의 롤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금곡동산교회 모든 성도들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었던 이유는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요나단에게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입었기에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도망할 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참 관계가 복잡하죠. 절친한 친구 요나단이 다윗을 도와주며 둘 사이에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적을 모두 없애버린 뒤에 요나단 자신의 집안을 돌봐주라는 것이었죠. 요나단은 다윗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사울을 막고, 또 다윗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어서 다윗이 도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먼저 은혜를 받았기에, 자신이 경험했던 은혜를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베풀어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먼저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 또한 그 은혜를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도 남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요나단이 자신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그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베풀어 주었습니다. 사울의 모든 재산을 므비보셋에게 돌려주고, 마치 왕자들처럼 대우해 주었습니다. 왕의 상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신하들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숨어있는 곳이 발각되어서 사울의 족속 모두를 다윗이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절하며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라고 이야기 합니다. 자신을 죽은 개라고 이야기 합니다. 죽은 개... 산 개가 죽은 사람보다 낫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죽은 개... 가치로 따지면 0. 정말 아무 쓸모없고, 가치 없는 그에게.. 당연히 죽어야만 할, 죽은 개와 같은 그런 처지에 있는 그에게 찾아와 손을 내밀어 주는 그런 다윗의 은혜는 므비보셋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격 없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지는 은혜..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런 사랑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던 우리에게 예수님은 먼저 다가와 주셨습니다.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어쩌면 이 말씀에서 우리가 먼저 봐야 할 굴뚝 청소 아이는 다윗 이전에 므비보셋인 것 같습니다.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린다면 그것이 무엇이 은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슨 잘난 것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 내세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내가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입니까? 아무런 가치 없고 죽은 개와 같은 그런 우리에게 먼저 다가 와 은총 베푸신 주님. 우리도 므비보셋과 같은 그런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죽은 개라고 하면 말이 좀 심하다고 생각 드십니까? 사실 이 ‘죽은 개’라는 말은 다윗이 먼저 했던 말입니다.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 대왕님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양을 치던 사람이고,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높은 자리에 오르지만,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시기로 쫓겨 다니던 도망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도리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데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 줍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울을 자신이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았고, 또 그렇기에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율법의 집행자가 아닙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원수 갚는 것 또한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벌할 자격 따위는 없습니다.

 

돌아가는 사울의 뒤에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상 24: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죽은 개와 같은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지만, 사실은 바로 다윗 자신이 죽은 개와 같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도망자의 신세.. 마치 죽은 개와 같았던 그를 이스라엘의 최고의 자리에 올려주시고, 가장 위대한 왕으로 만들어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윗에게 모든 것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였고 선물이었습니다. 스스로 죽은 개와 같다고 고백했던 과거의 도망자의 삶에서 인생 역전하여 한 나라의 왕이 되고 주변 국가를 점령하여 최고의 위치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은 므비보셋을 통해 다윗의 과거를 기억하게 하시고, 또한 다윗이 다윗대왕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받을 것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받아서는 안 될 것 같은 은혜들을 선물로 받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겸손은 스스로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바르게 안다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수많은 것 중에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24시간의 시간조차 사실 우리 것이 아닙니다. 무슨 근거로 내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매일 주어지고 경험한다는 이유로 시간이 내 것이라 한다면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도 우리의 소유겠습니까? 그저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매일 먹는 양식 중에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자신을 낮추신 것이지만, 우리의 겸손은 스스로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알게 되고, 또한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리고 다윗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죽은 개와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죽은 개’라는 말은 단순히 다윗에게 과거의 비참한 생활을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희망의 메시지도 됩니다. 우리가 비참한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됩니다.

 

죽은 개라는 말은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좋은 뜻으로는 절대 쓸 수 없는 말입니다. 성경에 안 나올 법한 단어인데 성경 전체에 보면 단 세 번 나옵니다. 언제 나올까요? 두 번은 나왔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다윗이 도망자의 신세로 되었을 때 나옵니다. 다윗이 도망하고 있는데 시므이라는 사람이 따라오면서 저주를 합니다. 그 때 다윗 대왕님의 충성된 수하 아비새가 다윗에게 말합니다.

 

삼하 16: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성경에서 단 3번 나오는 죽은 개라는 단어는 모두 다윗의 이야기에만 나옵니다.

 

다윗이 처음 도망자의 인생에서 스스로 했던 고백은 이스라엘의 최고 지위에 올랐을 때 므비보셋을 통해 듣게 되고, 또 반역으로 다시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된 다윗에게 수하를 통해 들려지게 됩니다. 원래 죽은 개와 같이 비참했던 다윗이 이스라엘의 최고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다시 말해 다윗의 삶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비록 다시 도망자가 되었지만, 그의 인생을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다윗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금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과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함께하십니다. 때로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고 고난이 오더라도, 심지어 나의 실수로 넘어지고 고통당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변화시켜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평안할 때 그 평안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또한 어려울 때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단순히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깊은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며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약속하신 축복을 바라며 살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더 몸을 갈아가며 그 복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자에게 은혜로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 가운데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하 22장에 나오는 다윗의 시를 읽어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삼하 22: 26~30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

 

겸손은 스스로를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르게 보고,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사무엘하9장설교원고
죽은 개와 같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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