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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이 행복이라 (요나 4장 5-11절)

설교 모음/이병용 목사 설교

by Hope103 2019. 1. 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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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살아있는 것이 행복이라

설교 본문: 요나 4장 5-11절 (개역한글판)

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살아있는 것이 행복이라 

요나 4:5-11

(금곡동산교회 이병용목사 설교문)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신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로 중요한 교훈을 하십니다. 즉 요나가 하룻밤 만에 났다가 하룻밤 만에 죽은 박 넝쿨을 아꼈다면, 손수 창조하신 니느웨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읽어 보면 요나는 처음의 불순종 상태로 돌아가 있습니다. 그는 전혀 신앙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유치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불순종으로 인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사건을 까마득히 잊고 있는 듯합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무결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죽을죄를 진 것으로 아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니느웨에 자비를 베푸셨듯이 요나에게도 재차 자비를 베푸십니다. 즉 어리석고 완악한 요나를 채찍질하시기보다는 박 넝쿨의 사건을 통해 그의 잘못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1.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요나의 의식 속에는 죄를 범한 영혼은 전혀 무가치하며 구원은커녕 복음에 접할 기회조차도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 삼 일간 들어감으로써 이러한 그의 생각은 많이 시정된 듯했습니다. 그는 인간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을 전혀 새롭게 한 듯했으며, 그래서 기꺼이 니느웨로 간 듯합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인간 생명의 절대적 소중함의 인식은 다시 점점 흐려지고 죄를 범한 영혼에 대해 경시하는 인식이 크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복음 전파로 인해 니느웨의 왕을 비롯한 십이만여 명의 생명이 구원을 얻었음에도 기뻐하기는커녕 불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뒤에서 수근거리던 유다인들의 모습이요 집 나갔다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인 아버지를 향해 불만을 터뜨린 형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영적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이러한 잘못을 범할 수 있음에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에 아직도 자기를 승복시키지 못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삼일 삼야를 보냈던 요나였습니다. 이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아를 죽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편견과 아집과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자기의 의견을 그대로 내세워 니느웨 백성들은 죽어야 한다고 하나님께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강요였으며 생트집이었습니다. 처음 다시스로 도망칠 때의 모습에서 조금도 나아진 모습이 아닙니다. 어디에서도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던 겸손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는 이와 같은 죄에로의 복원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 안에 있는 이 죄의 복원력을 근원적으로 파괴해야 합니다.


  3.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너무 빨리 잊고 있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나 죄를 범한 니느웨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이 죽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자신을 제쳐 놓고 니느웨 만을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그는 이미 물고기 뱃속에서 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은혜로 인해 그는 더욱 교만하여서 자신은 죄를 범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누릴 권리가 있는 자라고 착각한 듯합니다. 이렇듯 성도의 범죄는 불신앙보다는 처음 받은 은혜의 망각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은혜를 잊은 데서부터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이웃에 대한 정죄와 질투가 나옵니다. 그래서 그 결국이 불신앙에로까지 진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심비에 새겨야 합니다. 그것이 범죄를 막는 길이요 우리의 신앙 생활을 늘 풍요롭게 해주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4. 방관자로만 있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신 것은 니느웨의 멸망을 구경 시켜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였고 니느웨의 구원을 위해 긴요한 도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성 동편에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니느웨의 멸망과 자신은 전혀 무관하다는 자세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도 중에는 하나님 교회의 산적한 일과 세상에서 죽어가는 심령들을 구원하는 일이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곁들여 그들은 잔뜩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자신은 편히 앉아서 신실한 자들이 애쓰고 또 실패하는 모습을 보고 즐깁니다.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해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란 듯이 지켜보며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도의 일과 무관하듯이 그리스도와도 무관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그들이 변호를 요청할 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 7:23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항상 좋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약간만 상태가 나빠져도 크게 불평하는 경우가 있다. 신자에게 있어서 이런 태도는 금물이며, 도리어 악조건 속에서 섭리 하시는 하나님의 신뢰하고 끝까지 믿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네가 수고도...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께서는 이 교훈을 요나에게 주시기 위해 손수 요나가 거하는 곳에 박 넝쿨을 하룻밤 만에 자라게 하셨다가 하룻밤 만에 죽게 하였다. 거기다가 요나는 앞에서와 같이 여호와께 생명을 취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네가 화내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으시고 요나는 '그러하다'고 대답한다. 요나에게서 이러한 대답이 나온 것은 그가 박넝쿨이 어떻게 자랐고 왜 시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있는 죄인들은 물론이고 막대한 수의 앞뒤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어린이들과 짐승들이 살고 있는 니느웨를 왜 동정해야만 하는지 요나에게 설명하신다. 그것은 요나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유다인들에게 만연되어 있던 종교적 배타성과 이기주의에 큰 충격이 될 수 있는 말씀이었다. 또한 이 구절은 선교를 위한 획기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선택된 백성에게만 은혜가 있고 이방인에게는 멸망만 있으리라는 이스라엘의 편협성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이방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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